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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금자광록대부태사상주국문하시중평장사조공신도비명(高麗金紫光祿大夫太師上柱國門下侍中平章事趙公神道碑銘)
高麗金紫光祿大夫太師上柱國門下侍中平章事趙公神道碑銘 惟我東土僻在夷域而至周興殷太師來爲君長始施八條己變夷俗之舊也然道之體用之全與夫理之精微之蘊世無有繼作者而歷二千餘年五敎之敷日益斁仁賢之風日益衰矣當麗運將訖腥塵衝天而倫綱墮地誠亂極思治之秋也公姓趙諱璵貞一表德退休齋號也其先玉川人誕彌于玉邑氏即邑之鳴珂也諱璋光祿大夫檢校大將軍寔得貫皇祖皇考諱洪珪奉翊大夫版圖判書公禀得英豪之姿擩杂庭訓爲人坦蕩無裡襮之異好善疾惡出於天性事親至孝 忠肅王癸酉文科門下侍中平章事戊寅金紫光祿大夫特進上柱國檢校間爲太子太傳德尊崇祿而國有難疑則特進而問政時人稱 曰趙大老世則胡元之末也天下腥膻至于東土君昏相虐讒慝交搆焉 忠定王辛卯置經筵而拜公執義與李公齊賢朴公忠佐羅公英傑鄭公天濡洪公俊諸賢兼掌國學遞日講書談理無非正彝倫嚴華夷也程朱之學始興於世供佛飯僧之俗鏤膚卉裳之陋漸變矣公在廟堂内贊訏謨外叅庶政其所綜畫人皆自以爲不及也間以事八奏進言曰太祖草創大業南征北伐撫之以恩待之以禮其弘規遠畧深仁厚德固已培養千百年國脈也伏願殿下上念祖宗之庇麻下恤生民之塗炭惕然於中而思有以振之則此心之發即天地生物之心願益加省察而使吾胷中了然無纖芥之私然後公行賞罰以快朝野之憤則民心悦而士氣充不事親元孰敢侮余哉以是涵養聖志不惟今日之功可以必成而千古因循之弊庶乎其可革也上嘉納焉明使蔡斌被禍後李仁任池奫輩脅百官聯名爲書將呈北元有守先王決策終不署名者多被杖流于時圃隱鄭先生夢周潘陽朴先生尚衷上疏極論棄順從逆背強向弱之非計辭意甚切諸明而竟不納公白此絶意世事浩然賦歸鏟跡林泉琴書自靖噫若公知遇明世則致君於堯舜而澤民於皥皥如也而勳業之成就將何如哉公均于 洪武庚申窀穸于淳昌郡南侍郎洞枕酉原公娶靈光金氏 贈貞敬夫人子男一人元琦中門祇侯孫男三人曰淵文學鳴世八我 太宗朝文科舍人至吏曹判書曰漪朝散大夫曰浣宗簿寺事海州呉湛監察卽孫婿内外曾玄殆數十 人也貞敬夫人後公二十年 正宗庚辰卒墓用祔禮嗚呼公均距今六百餘年墓無徵築祀壇于任實 治北渴馬山戌阡而歲時裸獻若宋文治之世尚恨難保百年墳而况兵燹累經如我東土者乎余以後 生末學於公之銘曷敢謂形容乎萬一也雖然跡公之世其經術也其勳業也其仕止也其所與也足可 以觀其素養之贍富門路之的正也特終束而表之則大有補於世道孰謂夸張也風氣日弛喪不喪祭 不祭者往往接踵况孰能爲親盡遠祖而暴白其潛光也哉公可謂有後矣諸裔協謀僉宗大石備述事 行揭于神道問銘於余曰繋我先祖太師公平日嘉行懿蹟懷沒嵌巖愈泯知我願惠一言以圖不朽余 正衿曰祀宋之歎曷有古而今無哉攷家牒采巻誦而銘之可乎銘曰 綱紀國本而廢招亂政者正也不學何官其學維何忠信文行公生麗季鞮屨亂常身立廟堂責在經筵 講書談理程朱爲本以辨華夷以正彝倫勤於進言憂國憂民見疏不納自靖林泉孰曰我公稱一官人 考厥素履可知其源我銘不諛盍慕其賢欲知公者視此貞珉 檀紀四千三百十七年甲子三月 日 全州 李亨求 謹書 고려금자광록대부태사상주국문하시중평장사조공신도비명(高麗金紫光祿大夫太師上柱國門下侍中平章事趙公神道碑銘) 오직 우리나라는 후미진 이역(夷域)에 위치(位置)하였다. 주(周)나라가 흥할 때에 은(殷)나라 태사, 기자(太師箕子)께서 우리나라로 망명(亡命)하시여, 군왕(君王)이 되여, 비로소 팔조(八條)의 법을 베풀어 오랑캐 땅의 구습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도덕의 체통과 효용의 완전함과, 이(理)의 깊은 뜻을 세상에 계승해 나갈 사람이 없었다. 이렇듯 이천여년(二千餘年)이 지나도록 오륜(五倫)의 가르침은 날로 더욱 무너져서 인현(仁賢)의 풍속을 갈수록 쇠퇴(衰退)하여 마침,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질 무렴에 더러운 풍습이 충천하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이 땅에 무너지니, 진실로 극하면, 다스림을 생각할 때였다. 공의 성은 조씨(趙氏)요, 휘는 여(璵)요, 자는 정일(貞一)이요, 호는 퇴휴재(退休齋)이며, 그 선세(先世)는 옥천인(玉川人)이니 옥읍(玉邑)에서 탄생(誕生)하시여, 그 고을의 칭호를 따른 것이다. 휘(諱) 장(璋)은 광록대부검교대장군(光祿大夫檢校大將軍)이니, 이 분이 관향(貫鄉)을 받은 시조이다. 황고(皇考)의 휘는 홍규(洪珪)이니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라 공은 영특하고 호걸(豪傑)스러운 성품을 본받고 가정교훈(家庭敎訓)을 받아서, 사람됨이 평탄하고 넓으며, 안과 겉이 다름이 없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천성대로 하며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하였다. 고려 충숙왕 계유년(高麗忠肅王癸酉年)에 문과 문하시중평장사(文科門下侍中平章 事)에 及第하시고, 五年 後인 무인년(戊寅年)에 금자광록대부특진상주국검교(金紫光祿 大夫特進上柱國檢校)에 오르셨으며, 때때로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어, 덕과 녹이 높아서 朝廷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공(公)이 나가 정사(政事)를 의논하니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조대로(趙大老)라 칭하더라. 그 세대는 원(元)나라의 말엽이었는데, 천하가 더러운 냄새만 풍겨서 동토(東土)에도 군왕은 어둡고, 신하들은 사나워서 참소하고 사악함이 얽혀졌을 때였다. 충정왕 신묘년(忠定王辛卯年)에 경연(經筵)을 열고, 공에게 집의(執義) 벼슬을 배관(拜官)하였을 때 이공제현(李公齊賢)과 박공충좌(朴公忠佐)와 라공영걸(羅公英傑)과 정공천유(鄭公天濡)와 홍공준(洪公俊) 제현(諸賢)으로 더불어 국학(國學)을 권장하여 날로 번갈아 글을 강론(講論)하고 이(理)를 말할 적에 인륜(人倫)을 바르게 하고, 예의(禮義)를 밝히고, 이속(夷俗)을 물리치는 것을 엄하게 하여, 정주(程朱)의 도학이 비로소 밝혀지니, 부처에 공 드리고, 중에게만 밥을 먹여 살리는 풍속(風俗)과 몸에 문신하고, 풀잎을 엮어 몸을 가리는 더러운 누습(陋習)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공이 의정(議政)에 계실 때 안으로는 정책(政策)을 짜내시고, 밖으로는, 서무(庶務)에 참여하고 그 세밀한 계획을 남들이 모두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어느 날 임금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초창(草創)하여 남(南) 국(北)으로 정벌하며 은혜로 어루만지고, 예로 대접하여, 그 큰 규범(規範)과 먼 계략(計略)과 깊은 인과 후한 덕이 진실로 천백년(千百年)의 국맥(國脈)을 배양(培養)하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위로 조종(祖宗)의 넓은 덕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생민(生民)의 도탄(塗炭)을 건져낼 것을 빨리 서둘러서 시행(施行)할 것을 생각할 일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바로 천지(天地)의 만물(萬物)을 생육(生育)하는 마음이오니 원하건대, 보살핌을 더하시어, 가슴속에 일호(一毫)의 사심(私心)을 없앤 연후에 상벌(賞罰)이 공정(公正)하게 행하여져서 조정(朝廷)과 재야(在野)의 억울함을 씻어주면 민심이 희열(喜悦)하고 사기가 충만(充滿)하여져서 원(元)나라를 섬기지 않더라도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길 것입니까. 이것으로써 성상의 뜻을 길러나간다면 오직 오늘의 공(功)일 뿐 만 아니라, 천고(千古)에 미루어 오던 폐습(弊習)이 거의 개혁(改革)될 것입니다. 하였더니, 상께서 아름답게 여겨 받아드렸다. 명(明)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화를 입은 후로,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의 무리가 백관(百官)을 위협하고 연명(連名)으로 글을 써서 북원(北元)에 올릴 때 오로지 선왕(先王)의 결책(決策)을 지키고 서명(署名)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벌을 받고 귀양살이를 갈 적에, 포은(圃隱) 정선생 몽주(鄭先生夢周)와 반양(潘陽) 박선생 상충(朴先生尚衷)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순리(順理)를 버리고 역리(逆理)를 따르며 강을 등지고 약을 따르는 그릇된 계략(計略)을 끝까지 간하여 말하는 뜻이 간절하고, 밝았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공은 이로부터 세사에 뜻을 버리고 호연(浩然)히 일을 거두고 돌아가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추고 거문고와 책으로 자신을 편안하게 지냈으니, 공이 만일 밝은 세상을 만났더라면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훌륭한 분으로 이루고 백성을 편하고, 여유 있게 하였을 것이며, 공훈(功勳)의 성취(成就)됨이 그 얼마나 컸겠는가. 공이 홍무 경신년(洪武庚申年)에 몰(歿)하여 순창군 남시랑동(淳昌郡 南侍郎洞)에 안장하였으며, 공의 배(配)는 영광김씨(靈光金氏)시니,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이고 장남 한사람으로 휘는 원기(元琦)이며, 벼슬은 중문지후(中門祗侯)이곤 손남(孫男)은 삼인이니, 장손에 연(淵)은 문학(文學)으로, 이름 높아 태종조(太宗朝)에 문과사인(文科舍人) 벼슬을 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차손 의(漪)는 조산대부(朝散大夫)이고 계손 완(浣)은 종부시사(宗薄寺事)이며, 해주오담(海州呉湛)은 감찰(監察)이니 곧 손서(孫婿)이며 내외 증손 현손(内外曾孫玄孫)은 무려 수십인(數十人)이라 정경부인(貞敬夫人)은 공보다 이십년후(二十年後)인 정종 경진년(正宗庚辰年)에 졸(卒)하여 합장을 하였다. 슬프도다. 공이 몰(歿)한 후 지금(至今)까지 육백여년(六百餘年)이 되는 동안, 묘(墓)를 찾을 수가 없어 임실(任實) 고을 북(北)쪽 갈마산(渴馬山) 술좌(戌坐) 언덕에 제단(祭壇)을 쌓고 해마다 향사(享祀)를 드리려는 바, 송(宋)나라 같은 문명시대(文明時代)에도 오히려 백년간(百年間)의 무덤을 보전하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난리를 여러번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보전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내가 후생의 보잘것 없는 학(學)으로서 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하는데 어찌 감히 만분(萬分)에 일이라도 형용(形容)을 하겠는가 만은 공의 사적(事蹟)을 상고하여 보면 그 경륜(經倫)의 법(法)과 그 훈업(勳業)과 그 벼슬하고 안한 것과 그 處世함이 족(足)히 소양(素養)의 풍부함과 학문(學問)의 길 바름을 볼 수 있으며 종합(綜合)하여, 표현(表現)한다면, 세도(世道)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어느 누가 과장(夸張)하였다고 말하겠는가. 이제 세상(世上)이 말이 아니어 초상이 초상답지 않고, 제사가 제사답지 않은 일이, 간간히 계속되는 때에 누가 능히 먼 조상을 위하여 묻혀있는 빛나는 덕행을 드러내리요 공(公)은 가히 후손(後孫)이 있도다. 여러 후손(後孫)이 의사를 합하여 대석(大石)을 다듬어 아름다운 우리 선조(先祖) 태사공(太師公)의 평일(平日)에 겪은 아름다운 행적(行蹟)이 산골에 파묻혀서 날이 오래갈수록 더욱더 없어져가니, 한 말씀을 써 주시면 그 행적이 없어지지 않게하여, 오래도록 전하려 한다. 말하기에 내가 몸을 단정히 하고 말하기를, 선세(先世)의 문헌(文獻)을 증거대지 못함이 어찌 옛날에만 있고 오늘에 없겠는가 하고 가첩(家牒)을 상고하여 전해 온 말을 채택하여 명(銘)을 쓰는것이 가할 것이라 하고 명를 써 가로되, 기강(紀綱)은 나라의 근본(根本)이며, 폐(廢)하면 난을 불러들이게 하는 것이다. 정사(政事)라 함은 바르게 하는 것이니 학(學)이 아니면 어찌 벼슬을 할 것인고. 그 학문(學問)은 어떠한 것인가. 충(忠)과 신(信) 문(文)과 행(行)이라. 공의 고려말(高麗末)에 태어나시니, 어지러운 난리를 겪었도다. 몸이 의정당상(議政堂上)에 계시니, 책무(責務)는 경연(經筵)에 있었도다. 시서(詩書)를 강구(講究)하며, 도리(道理)를 담론(談論)할 제, 정주학(程朱學)으로 본을 삼았도다. 예의국(禮義國)과 오랑캐를 분별하고, 떳떳한 윤리(倫理)를 바르게 하였도다. 임금께 말씀을 올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였도다. 상소(上疏)를 받아드리지 않음을 보시고 조용한 산골에 심신(心身)을 편안히 하시도다. 그 누가 우리 공을 보고 한낱 벼슬살이라고만 할 소냐. 평소(平素)의 행실(行實)을 상고하여보면 올바른 그 연원(淵源)을 알 수 있으리라. 내가 명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니 어찌 그 현(賢)을 흠모하지 않으리. 공을 알고저 하는 이는, 이 비(碑) 돌을 볼 지어다. 檀紀四千三百十七年甲子三月 日 全州 李亨求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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